2002년 지방선거와 열린사회의 대응
한국에서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것은 1952년 한국전쟁 이후였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90년대 들어서부터이다. 1987년 6월민주화항쟁 이후 사회전반의 민주화 흐름에 힘입어 91년 지방의원선거가 부활되었고 94년과 98년에는 단체장 선거와 지방의원선거가 실시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10년 남짓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의 지방자치제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중앙집권적 정치와 사회시스템이 아직도 강력히 존재하고 있고 중앙정부의 권한이양도 부실하여 지방정부로서의 독자적인 지위가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주민의 참여가 부족하다는 점이 취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빠른 시민사회의 성장, 지역운동의 성장은 지방자치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 세기에 걸친 서구의 근대화역사에 비해 한국사회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급격한 사회변동에 따른 불안정성과 중첩된 의식구조가 여러 가지 문제를 낳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우리사회의 민주주의시계가 거꾸로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권력이나 행정기관에 대한 일반시민들의 태도, 양자간의 의존관계 등을 한 10년 전과만 비교해봐도 그 동안 시민자율문화가 얼마만큼 성장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지난 10년간 우리사회의 각종 이익단체나 시민단체의 증가정도, 현재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을 보면 가히 비약적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장은 90년대 중반이후 지역사회로 계속 확산되고 있으며 지역시민단체의 활동도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이러한 시민사회의 성장을 배경으로 보다 완전한 것으로 거듭 발전해야할 시점에 서 있다.
지역은 생활의 기초단위이자 출발점이다. 지방자치는 참여민주주의, 생활정치 구현의 장이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지역정치시스템과 인적구성을 개혁하고 주민참여를 보장하는 영역의 확대에 지방자치가 기여하여야 한다. 지방자치의 본래 목적은 ‘분권’과 ‘자치’이다. 근대화과정에서 중앙정부에 집중되어있던 권력을 분산시켜 유연화하고, 시민들의 자치능력에 의해 지속적인 사회발전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권한은 책임을 동반한다. ‘요구’하고 ‘주장’하는 시민에서 ‘책임’지고 ‘해결’해 나가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에 지방자치의 요체가 있다.
지방자치의 발전은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역에서 세계를 보는 관점을 키워야 한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가까워지고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광역화되었다. 이미 경제는 국경을 넘어 자본과 노동의 이동이 급변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 또는 중앙을 중심으로 세계와 접촉했지만 이제 지역에 앉아서도 세계의 변화속도를 접하게 되었다. 국가와 지역의 관계는 수직적 관계라기보다는 수평적 관계, 역할분담의 관계로 변하고 있다.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자’는 말의 의미를 잘 새겨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방자치의 의미를 잘 실현하기 위해서는 선거와 정치와의 상관관계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는 선거가 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가 정치의 전부일 수는 없다. 특히 지방자치에서는 선거보다 일상적인 주민참여가 보다 중요한 정치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주민발안, 주민투표, 주민소환 등의 직접민주주의적 참여와 각종 위원회의 참여, 실효성있는 공청회 등을 통한 의견표명, 정보공개운동, 각종 주민운동 등 지방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 일상적으로 주민이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2주일간의 선거기간만 반짝하는 “2주정치의 객체”에서 일상적으로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4년정치의 주체”로 주민이 나서야만 한다.
지방정치의 주체는 당연히 주민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소외되어 있다. 중앙정치의 현실이 국민과 유리된 정치인들이 정당에 예속되어 국민없는 정치인들만의 정치를 하고 있듯이 지방정치 또한 중앙정치에 예속되어 있고 주민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지방정치는 주민의 생활상 문제를 다루고 주민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지역을 주민자치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다. 주민들이 지방정치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지방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벽을 깨야 하고, 지방정치의 실제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자치의 능력을 키워야 한다. ‘지역이 바뀌면 자신의 생활이 바뀐다’는 철학을 참여의 경험 속에서 체험토록 하는 것, 곧 지역주민들의 자치운동을 활성화할 때만 지방정치의 주인으로 주민이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지방정치인은 지역주민의 ‘대리인’이 되어야 한다. ‘대리인’이라는 의미는 “주민들을 대신하여 의사표시를 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지방정치인과 지역주민과의 관계를 나타낸 말이다. 지방정치인은 보스가 아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권력을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지방정치인은 주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자신이 가진 공신력을 이용하여 주민들을 조직하고 주민들의 의사를 수렴하며 그것을 전달하고 주민들의 의사가 정책결정과정에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민들이 참여의 경험을 쌓는데 기여하여야 하며 ‘시민참여의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지방자치의 본질적 의미와 지방정치의 역할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다음으로는 열린사회시민연합이 2002년 지방선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하려하는 지에 대해 지방자치위원회의 논의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본래 지방자치는 지역주민들의 삶의 환경적 요소들, 예컨대 각종 법과 조례, 제도와 관행 등을 개혁하여 그 지역의 사회환경을 바꾸고 주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사회제도를 만든다 해도 주민들의 의식 변화와 발전이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좋은 법과 제도가 있는 자치구의 주민이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주민'은 아닌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측면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 주민들이 공동체에 참여하여 주체자로 나서게 하는 일, 이는 좁은 의미의 지방정치 영역을 넘어서서, 지역사회 공동체운동의 영역이고, 몫이다. 현직에 있는 개혁성향의 지방의원 중에 많은 의원들이 "아무리 좋은 조례와 정책을 내놔도 이를 활용하는데 필요한 주민들의 의식 변화가 없음"을 한편으로는 한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해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치의 영역으로 운동의 영역을 대신하려고 한 데서 비롯된 혼란이다.
우리는 '정치'로서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시민단체 활동가의 지방의회 진출문제를 바라보고자 한다. 지방의회에 진출하면 좋은 제도와 정책을 실현하여 지역사회와 주민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이지만, 지역사회공동체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지역사회의 현안에 대한 정보력을 확보하고 전향적인 민․관 파트너십을 매개하며, 또한 시민단체 소속의원의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의 신뢰와 영향력을 넓힐 수 있다. 이런 유형의 활동은 생협조직을 토대로 했던 일본의 가나카와네트워크의 예에서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의 1인 보스 중심의 정당구조에서 정치는 사회 모든 분야의 최상에 위치하고 있지만, 앞으로 이러한 파행적 구조는 개혁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밑으로부터의 지방의정활동은 지방자치의 개혁뿐만 아니라 중앙정치 개혁의 밑거름으로도 작용할 것이다.
2002년 지방선거를 겨냥하여 적지 않은 수의 시민단체 출신의 인사들이 지방정치에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년부터 영남과 호남 등 여러 지역에서 분권의 확대, 주민참여 제도화, 지방정치개혁 등을 위한 제도개혁운동과 선거참여를 내세우며 자치연대라는 명칭으로 세력화를 꾀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었다. 또 환경운동 출신의 인사와 단체들이 지방선거 참여를 통해 상당수의 녹색후보를 지방정치에 진출시키고 더 나아가 녹색당의 전망을 개척하겠다는 흐름도 있다. 몇몇 청년단체와 지역주민단체에서도 그 동안의 지역운동기반을 토대로 기초의회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 중 많은 부분은 이번 지방선거를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의 계기로 만들려는 흐름과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정치세력화의 과정으로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삼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과거 시민사회운동의 선거시기 대응방식을 유추해보면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일이다.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 논의는 진보정당을 표방하고 있는 기존 민주노동당의 이념적 성격이나 조직기반이 협소한 점을 감안하면 이에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기보다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며 민노당과 거리를 두고 별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현재 기성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감안한다면 이런 시도가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시점에서 시민운동세력이 직접 정치에 뛰어들 경우 정치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지 하는 현실적 가능성과 아울러 과연 사회발전에서 시민운동이 기여해야 할 고유의 역할에 비추어서 이러한 정치세력화 시도가 도움이 될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치개혁은 기성의 것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 나타나고 또 그 대안세력이 실질적으로 기성정치세력을 극복할만한 실력을 갖출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서 기성정치세력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미래사회의 비전과 이념, 실천력, 그리고 사회운영능력을 갖출 때 가능해진다. 이 점에서 시민사회 내에 기성정치세력을 극복할 대안이 충분히 준비돼 있는 지에 대해 깊이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가 궁극적으로 시민사회의 수준에 의해 규정된다면 지금은 시민운동이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더구나 중앙정치차원의 활동보다는 시민들의 의식변화와 지역공동체 형성을 위한 노력에 중점을 두고 있는 풀뿌리시민단체들에게는 중앙정치무대에 진출하기 위한 정치세력화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운동내부에 정치세력화 논의가 진행된다 할 때 열린사회시민연합과 같은 풀뿌리시민단체가 이에 참여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선거에 나온 시민단체의 후보들 중 믿을 만한 사람들이 있을 경우 이들을 지역조건에 따라 선별해 지지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도 지역에서 대중활동을 하는 풀뿌리 단체의 특성상 다른 여러 정파들에 등을 돌리는 협소한 정치적 대응은 피하는 것이 좋으며, 정치세력화를 위한 연대조직에 명시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위와 같은 근거 하에서 2002년 지방선거에 임하는 열린사회시민연합의 일반적인 활동원칙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지역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기권을 반대하고 주위사람과 함께 주민 참여의 기본수단인 투표권을 반드시 행사한다.
둘째, 자기 지역 후보의 공약 등을 비교, 분석하여 정당․단체를 불문하고 시민사회의 발전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개혁적인 후보에게 투표한다.
셋째, 풀뿌리시민단체의 활동을 통해 검증되고 지역공동체운동을 위해 지역주민의 대리자로서 성실히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을 후보로 진출시켜 당선시킨다.
넷째, 정치세력화를 목적으로 한 연대활동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다섯째, 선거시기에 특정 정파를 위해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받아 이후의 지역활동에 장애를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
* 이 글에서 지방정치의 의미에 관한 부분은 < 하승수, “생활정치로서의 지방정치의 의제”, [시민운동과 지방정치 토론회 자료집], 시민자치정책센터 등, 2001 >을 참고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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