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하나다”
영국의 날씨는 생각보다 무척 추웠다. 거기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의 변덕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바쁜 일정에 쫓겨 출장 가서 해야 할 업무에만 신경썼지 모처럼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전준비를 제대로 못한 것에 대해 같이 간 다른 3명들도 모두 한 마디씩 하였다. 이번 여행은 유럽 여러 나라의 소규모 지방자치단체들을 방문하여 주민자치활동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10월 달에 제주도에서 있는 주민자치센터박람회의 주요 프로그램인 국제세미나에 초청할 사람들을 물색하고 섭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번 여행은 2개의 지방정부 공식방문을 포함하여 10여개의 기관과 단체를 방문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중한 정보들을 얻는 기회가 되었는데, 공식적인 일과 관련된 얘기는 다른 기회에 하도록 하고 이 글에서는 여행 중에 느꼈던 소감을 몇 마디 생각나는 대로 옮겨보려고 한다.
11박 12일의 이번 여행에서 거쳐 간 도시가 대략 10여개는 되는데, 제일 처음 묵은 도시는 영국 맨체스터공항에서 1시간반가량 달려 도착한 웨스트랭카셔의 작은도시 옴스키르크였다. 다음날 아침 들판 한가운데 있는 고급호텔(적어도 숙박요금만큼은) 앞마당에서 바라본 영국 하늘은 참 크고도 넓었다. 사방에 산이라고 부를만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단지 멀리 보이는 건물들과 숲들이 땅과 하늘을 구분해줄 뿐이었다. 이 날은 마침 유로 축구 2004의 영국팀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창문마다 잉글랜드 깃발이 걸려있었고, 시장 집에 저녁식사를 초대받은 우리 일행은 혀 짧은 영어로 “컴 온 잉글랜드”를 외치며 속절없이 연장전까지 축구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금발미녀인 동거녀와 개 한 마리가 식구의 전부인 시장은 모처럼 집안을 꽉 매운 손님들을 위하여 시종일관 유머와 재롱(?)으로 분위기를 돋구었고, 평소에 운동경기와는 인연이 멀었던 나도 축구광인 그를 위하여 경기중간 휴식시간에 뒷마당에 나가서 공을 함께 차주어야 했다. 이날 경기는 영국의 패배로 끝났는데, 이번 유로 축구에서는 전통적인 강팀들이 탈락하는 이변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일행이 방문하는 나라마다 꼭 그 나라가 약체팀에게 패배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파리를 방문하던 날 프랑스가 패하였고, 암스테르담을 방문한 날도 네덜란드가 패배하여 홀리건들에게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일행들의 협박(?)에 따라 나는 암스테르담의 그 유명한 붉은빛 밤거리관광을 포기해야만 했다.
달랑 주소 적힌 종이 한 장만 들고 드골공항에 내렸을 때,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 일행 중에 영어와 독어가 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어느 한 사람도 간단한 불어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고, 프랑스 사람들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잘 안된다고 들었었기 때문이다. 몇 대의 택시에게 거부당한 후에 우리는 얼핏 보기에 아랍계인 듯한 한 젊은 택시운전사를 만날 수 있었다. 운전사에게도 우리가 찾아갈 ‘세르지’라는 곳은 지도에서만 본 낯선 지명이었다. 우리 나라로 치면 서울에서 부천 중동신도시에 있는 어느 마을회관을 찾아가는 것과 비슷했으니 헤매기는 운전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친절한 운전사는 시종 진지한 얼굴로 말도 안 통하는 낯선 이국인들을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몇 번인가 동네 사람들에게 묻고 같은 곳을 선회하다가는 급기야는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 일행 한 명과 함께 전화걸 곳을 찾아 뛰어다녀서야 우리는 겨우 국제미아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고생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고 택시요금에 몇 푼 얹어준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당연히 줘야 할 짐값(여기서는 승객요금 외에 짐 하나당 얼마씩 요금이 추가되는 것이 관례였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즐거운 여행되기를 빈다는 말을 남기고 횡하니 떠나가버린 그 운전사의 맘씨 좋은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괜히 미안해진다.
프랑스에서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로의 여행은 기차여행이었다. 유레일 패스를 미리 준비한 우리들은 비교적 싼 가격에 떼제베, 이체 등 유럽의 초고속열차부터 우리의 지하철과 도로 중앙의 버스전용차로를 합친 것과 비슷한 개념의 경전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차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브뤼셀을 거쳐 쾰른, 뒤셀도르프, 도르트문트, 암스테르담 등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면서 느낀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유럽은 하나다’라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을 전혀 의식할 수 없었고 역에서 내려 거리로 나갈 때도 차표검사 한 번 받은 적이 없다. 어느 도시를 가나 동일한 화폐가 쓰이고 있고 백인, 황인, 흑인들이 섞여 사는 것도 비슷했다. 물론 도시마다 언어가 다르고 건물의 특색이나 즐겨먹는 음식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건 북경과 상해가 다르고 광동이 다른 정도의 차이 밖에는 안 느껴졌다. 오히려 같은 중국이지만 심천에서 홍콩으로 넘어갈 때의 그 지루한 통관절차와 번잡스러움에 비하면 유럽이 한 나라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독일에서는 우리 유학생들과 교포분들의 바자회로부터 시작해서 웃음소리가 특이해서 인상에 남았던 에어크라트시의 시장과 전형적인 철밥통 관료를 연상시켰던 독일관리들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무원이 되어 우리 사무실 반은 됨직한 쾌적한 공간에서 일하고 있는 아리따운 20대 초반의 여성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은 쾰른대성당 광장에서 만난 노신사였다. 일요일 하루 시간을 내어 우리 일행은 가까운 쾰른시를 관광하였다. 기차고장으로 한 정거장 전에 내린 덕분에 걸어서 건넌 라인강 다리위에서 바라본 쾰른 대성당과 주변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대성당 안에서의 미사장면은 매우 웅장하고 엄숙했지만 빽빽이 들어찬 관광객들로 그 경건함이 많이 훼손되어 아쉬었다. 그리 넓지 않은 앞 광장에서는 파륜궁 수행자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인권탄압에 대한 호소부터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는 홈리스들의 거리공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장면들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분주히 움직이던 내 캠코더의 앵글이 한 순간 숨을 죽이고 멈춰섰던 것은 전통악기인 듯한 현악기를 연주하고 있던 4명의 예술가들을 바라보고 있던 한 노신사에 맞추어졌을 때였다. 평범한 옷차림에 온화한 얼굴로 처음부터 끝까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음악을 감상하고 있던 노신사의 모습은 연주되고 있는 아름다운 음악 이상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었다. 음악이 끝나고 서서히 움직여 박수를 치는 노신사의 주름잡힌 굵은 손마디는 그 삶의 깊이와 무게를 전해주기에 충분하였다. 캠코더 화면에 클로즈업된 그 노신사의 굵은 손마디에서 유럽의 전통과 문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면 과장된 것일까? 마치 오래된 나무의 잘려나간 밑둥에 남겨진 나이테를 보고 그 나무를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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