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를 다시 생각해봄.
외부인들에게는 우리 단체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게 쉽지 않은가 보다. 익숙치 않은 우리단체이름을 언급하려던 사람들은 ‘열린’이란 형용사와 ‘시민단체’라는 이미지를 결합시키려다보니 “열린+시민~~”과 같이 말을 중간에서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다. ‘열린사회’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어 한 단어로 쓰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본래 ‘열린사회’라는 개념은 비판적 합리주의 철학자인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라는 책에서 쓴 개념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은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등의 역사적 결정주의가 인류를 ‘닫힌 사회’로 이끌었다고 비판하면서,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한 '열린 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포퍼의 열린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된 사회이며 개인이 그의 이성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사회이다. 이때 자유란 다수와 의견을 달리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인간 진보의 원천으로서의 자유이며, 권리란 자신의 지배자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로 규정된다.
이렇게 서구근대사상의 맥락에서의 ‘열린사회’는 ‘전체’ 혹은 ‘집단’에 대비한 ‘개인’에 방점이 찍혀있는 반면, 좀 다른 맥락에서 ‘열린사회’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을 ‘개인’ 그 자체보다는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의 인간(人間)’으로 이해하려는 동양적 전통과도 연관을 맺고 있는 사고인데, 여기서는 ‘열린사회’를 개인의 아집이나 독선에서 해방되어 소통(疏通)하고 연대하는 성숙한 사람들의 집합으로서의 ‘열린사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단체에서는 ‘열린사회’가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을까? 지금부터 10년 전 우리 단체의 창립 즈음에 단체의 명칭과 비젼을 둘러싸고 많은 논의가 있었다. 잘 알다시피 우리 단체는 6월항쟁에 뿌리를 둔 서울지역의 두 시민단체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단체이다. 때문에 우리의 전통 속에는 권위주의 국가에 대항하여 투쟁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내재화되어 있으며, 이는 포퍼가 얘기했던 ‘열린사회’와 맥이 닿아있다, 그런데 왜 ‘민주사회’가 아니라 ‘열린사회’였을까? 그것은 당시 민주화투쟁을 이끌어왔던 우리 자신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성찰의 결과이기도 했다. 강한 국가에 대항했던 ‘운동권’이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차원에서 권위주의와 결정주의적 세계관을 대중과 회원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위나 도덕적 의무가 아닌 개인의 자율적 판단과 성찰을 중시하고, 국가정책의 선호를 두고 시비를 다투는 현실정치의 장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생활실천을 조직하는 지역사회를 택한 것이 ‘열린사회’의 정신이었다.
‘열린사회 시민연합’이라는 단체명칭과 함께 미래지향과 비젼을 나타내 주는 표어로 채택한 것은 ‘사람을 존중하는 희망공동체’였다. 그것은 사회의 진보를 위한 노력에서 사회제도 개혁 이상으로 사람의 변화와 발전을 중시하겠다는 새로운 선언이었다. 사실 근대사회에서 대부분의 진보운동은 국가권력의 장악과 그 힘을 동원한 정치, 경제제도의 개혁을 목표로 했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제도개혁운동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민주주의국가에서 성공을 거둔 것도 사실이지만, 지나친 급진주의적 개혁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를 후퇴와 파멸로 몰아넣었던 것도 사회주의나라들의 경험에서 우리는 목도할 수 있었다. 사람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 그 수준만큼 제도변화를 이루고 또 그 제도 변화의 토대 위에서 더욱 높은 단계로 사람의 성장을 이루어가는 선순환과정이 사회진보의 올바른 길이 란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사회진보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생활에서도 행복의 척도는 그 사람이 얼마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느냐? 아니면 어떤 탄압이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가? 라기 보다는 이제 그 사람이 얼마만큼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느냐? 하는 것이 더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쉽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우리 단체의 운영위원들과 몇몇 뜻있는 분들이 매달 말 하루씩 시간을 내어 워크숍을 이어가고 있다. 조직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비젼과 미션을 재점검하기 위해서이다. 지난 번 워크숍에서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철학과 단체의 비젼을 알아보기 위해, 토론을 통해 선택되어진 단어들이 ‘사람존중’, ‘소통과 나눔’, ‘조화로운 삶’이었다. 이 단어들 속에는 우리 단체의 철학과 비젼이 잘 녹아들어가 있다. ‘사람존중’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물질이 아닌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 즉 사람의 변화와 발전을 통해 사회의 진보를 이루려는 우리 단체의 중심철학을 표현하고 있다. 보다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옹호, 그리고 주의주장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의 자율적 판단과 선택을 존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통’은 막히지 않고 서로 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타인과 사회에 대해 열림을 뜻하고, 다양성에 대한 수용이며 나아가 배제(排除)를 넘어선 화합(和合)을 낳는 통로이다. 여기에 ‘나눔’은 보다 적극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외부와 소통할 뿐 아니라 나아가 나눈다는 것이다. ‘나눔’에는 개인주의에 터한 자유와 평등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일체감의 표현이다. ‘조화로운 삶’은 철학적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조화, 정신과 물질의 조화 등을 의미하고 실천활동면에서는 교육, 문화 프로그램 등 내면적 성숙을 위한 활동과 지방자치 등 외부적 개혁을 위한 활동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0여년 전 우리 단체를 처음 만들 때 공유되었던 철학과 문제의식, 그것은 오늘도 우리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면면히 이어 흐르고 있다. ‘열린사회 시민연합’이란 명칭과 ‘사람을 존중하는 희망공동체’란 표어, 이것은 창립 당시 우리 단체의 전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지향을 잘 나타내 주는 개념이었다. 이제 그것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키고 실천활동 속에서 풍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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