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4일 화요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봄(2007.9/회지)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봄.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백성(民)이 주인(主)되는 정치제도와 사상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아테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여 다수결 원칙하에 도시의 운명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직접민주주의이다. 근대에 와서 시민이 선출한 대표를 통하여 결정 권한을 대리해서 처리케 하는 대의(代議)민주주의가 발전하였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자들의 부패와 나태, 유권자의 무관심과 냉소를 가져왔다. 대의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의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를 격고 있다. 갤럽의 45개국 조사에서 의회에 대한 신뢰는 다른 여섯 개 정부 및 사회기관에 대한 신뢰보다 훨씬 낮은 38%에 불과했으며, 한국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 11%로 최저를 기록했다. 

대의민주주의의 결손을 직접민주주의제도로 보완하고자 하는 처방이 있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을 거치면서 시민단체의 참여, 인터넷공간에서의 참여 등 전통적 대의민주제적 요소가 아닌 시민의 참여확대가 이루어졌고, 지방자치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주민투표, 주민발안, 주민소송, 주민소환과 같은 직접민주주주의의 핵심적인 제도적 장치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직접참여의 방법이 민주주의의 결손을 치유하는 만족할만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최근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한 동에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주민들을 자주 접할 수 있는 몇몇 노인분들과 통반장이 중심이 되어 주민 3분의 2 동의서명을 받아 현임 동대표를 불신임한 것이다. 불신임의 표면상 이유는 동대표가 공공기관에 근무하고 있으므로 공무원의 겸직을 금지하고 있는 아파트규약을 위반하였다는 것이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부당한 요구를 계속 거절하여 왔고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위야 어찌됐든 주민소환권을 제대로 행사한 셈이다. 지금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한 주민소환권 행사가 법적으로 보장되면서 몇몇 시장, 군수에 대한 주민소환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그 끝이 합리적이고 공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결론맺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다. 

문제는 시민참여의 제도적, 양(量)적 확대가 민주주의의 질(質)을 저절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위의 아파트 사례에서도 불신임서명을 하는 주민 각자가 그 의미에 대해 충분히 심사숙고해보거나 반대되는 입장의 정보를 접하고 상호토론해보거나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공동체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설혹 참여의 기회가 오더라도 책임 있게 깊이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각자 처지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직접 참여제도는 해당 사안과 이해관계가 더 많은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 정보가 편향되게 전달되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하고, 일부의 이익을 전체의 이름으로 합리화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대의민주주의의 결손, 직접민주주의의 위험성, 인류가 발전시켜온 최상의 사회운영제도인 민주주의가 이렇게 허점투성이라면, 우리는 정녕 헤어 나올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것일까?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질(質)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主體), 곧 사람들의 의식과 문화의 성숙정도이다. 질 높은 민주주의, 성숙한 시민사회를 위해서는 먼저 상호성(reciprocity)의 원칙이 확립되어야 한다. 타인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욕구를 넘어서서 상호 수용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할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공공성(publicity)의 원칙이다. 정책결정과정이 사익과 특정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 공공선에 대해 숙의할 수 있도록 정보가 충분히 공유되고 토론과 대화의 과정이 중시되어야 한다. 셋째는 책무성(accountability)의 원칙이다. 민주주의는 권리의 행사에 따른 책임과 의무가 함께 해야 한다.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시민들과 대표자들은 누구에게나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상의 원칙들은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실천될 수 있는 조건들로 제시된 원칙들이기도 하다. 심의민주주의는 최근 많은 정치학자들에 의해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연구되고 있고, 그 실험적 적용들이 미국 등 선진국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심의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아이디어와 함께 풀뿌리공동체운동을 통한 실천적 경험 또한 질 높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소중한 자산이다. 주민자치의 과정을 중시하고, 시민들의 학습을 앞세우며, 공동체 안에서의 자원봉사를 생활화하는 우리의 활동은 바로 시민들의 상호성, 공공성, 책무성을 강화해가는, 질 높은 민주주의를 위한 주체의 성숙과정이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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