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항쟁에 힘입어 김천교도소에서 석방된 것이 7월 8일이었고 그 해 가을학기 나는 복학하였다. 하지만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복학을 앞두고 찾아온 후배들은 석방된 선배들 중에서 총학생회장선거에 출마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학내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던 84학번 핵심운동권의 대다수가 아직도 구학련, 건대사건 등으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의 압도적 지지와 학교당국의 공식인정 속에 출범한 서울대총학생회는 전두환, 노태우로 대표되는 군사정권세력의 완전한 퇴진과 민주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내가 총학생회장 자격으로 처음 참여했던 대외활동은 공교롭게도 전대협이 준비했던 양김초청토론회를 무산시킨 사건이었다. 6월항쟁의 선봉에 서서 국민의 많은 신망을 받고 있던 전대협을 이끌었던 일부 학생리더들은 당시 유력한 야당지도자였던 양김씨 중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DJ에게 힘을 실어 대세를 만들어 보자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챈 YS가 불참을 통보해오자 토론회강행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밤새 진행되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에서 학생의 정치적 순수성 유지와 대동단결을 통한 민주화라는 서울대학생회장의 주장이 6월항쟁의 신화를 일궈낸 서대협 주류의 입장을 꺾고 지방에서 올라온 다수 학생회장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이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10월 25일 고려대교정에 10만군중이 운집했던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 주최의 시국집회는 공식 선거운동 국면을 앞두고 민주세력의 대동단결을 호소한 마지막 분수령이 되었던 집회로 기억된다. 나는 이 집회의 사회를 봤었는데 양김이 연설하는 동안 그 지지자들이 김영삼 또는 김대중을 연호할 때마다 연설을 중지시키고 '대동단결'을 선창하여 호소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결국 그 집회를 깃점으로 양김은 각자 출마를 선언하여 민주정부 수립의 꿈은 무산되었고 나는 그 1주일 후인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섰다가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의 마지막 수감자가 되었다.
조완규 총장님을 비롯한 많은 교수님들과 수많은 학우들이 나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주셨지만 대선을 앞둔 싯점에서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사면복권장을 받고 석방된 것은 민주화운동 관련인사에 대한 마지막 석방이라고 했던 88년 12월이었고, 교수님들과 후배님들의 도움을 얻어 90년 8월에야 뒤늦게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총학생회장 활동의 기억은 나의 학창시절 기억의 일부에 불과하다. 동사과의 일원으로서 기억은 2학년과 3학년 때였다. 82학번은 계열별 입학이었기 때문에 2학년 올라가면서 동사과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4학년 때는 5월달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을 전후해서부터 실질적으로 수배상태에 있었기에 4학년 이후 졸업시까지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2,3학년 때의 학교생활이 정상(?)적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2천여명(후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은 200여명이었다)의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군사정권이 무장한 경찰병력을 강의실 앞에 까지 빈틈없이 배치하고, 또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이를 항의고발하고자 도서관에서 몸을 던져 피흘리며 죽어가는 현실에서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20대 끓는 피 청춘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였다.
당시 동사과 학생의 8~90%는 직간접적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했었고 또 그것이 당연시되었다. 우리 동사과는 다른 과와 비교하여 학생수도 많지 않았고 선후배사이의 유대관계도 돈독하여 마치 한 운명공동체와 같은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었다. 학기초 신입생환영회로부터 시작하여 여름 농활, 가을 과여행 등의 과 전체활동과 학회별 세미나학습활동과 뒷풀이, 축제나 대동제, 학생총회와 같은 학교 전체활동에 이르기까지, 강의와 수업,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동사과 사무실을 중심으로 한 과 공동체 안에서 함께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학부생도 원사료를 강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것을 고집하셨던 교수님들의 엄격한 교육기준 덕분에 생고생도 많이 했지만, 교수님들은 항상 우리 동사과 공동체를 외부의 칼바람으로부터 지켜주시는 울타리셨고 인생의 스승이셨다.
"똥싸러 가세~ 용화세계를 에라 이루러 가" 하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동사과 과가(科歌)를 목청껏 불러제끼던 그 때의 그 목소리들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나는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좌파운동에 깊숙히 몸담았던 청년기의 오류를 반성하고 새 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지금도 시민자원봉사운동과 풀뿌리공동체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때 불러제꼈던 용화세계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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