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운동의 현황과 과제
1.중도(中道)
한국사회의 정치는 시민사회의 토대 위에서 진전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국가 수립 이후 5공화국까지 권위주의 국가에서 지내오면서 국가가 먼저 이루어지고 다음으로 경제 및 사회가 국가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역순의 과정을 밟아왔다. 또 한국사회에서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 형성은 서구와 같이 역사적 단계를 전체사회가 밟아오면서 다원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군부와 관료, 재벌을 중심으로 한 체제의 비대화에 대하여 민주화세력의 도전 즉 정치적 공간에서 상징능력이 가장 두드러진 세력들이 서구의 공공권역과 상응하거나 그 과정을 축약한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는 노력과정에서 생겨났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성립으로 한국사회는 저강도민주주의(low intensity democracy)를 넘어 고강도민주주의(high intensity democracy)의 단계로 이행하기 시작했고, 개발도상국형 사회갈등구조와 선진국형의 탈근대성을 띤 생활세계의 과제가 중첩되어 표출되는 복잡성을 띄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의 시민운동은 정치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 기능, 나아가 대안적 정치기능을 수행해왔다. 그것은 과거 한국 정치권이 전근대적인 정치사회구조 개혁의지의 부족, 정치부패행위의 만연과 국민의 불신 등으로 한국사회발전의 장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2차례의 선거를 통한 수평적 정권교체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갈등의 정치적 수렴과 대중의 정치적 선택은 제도화된 틀 안에서 수용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고 시민운동의 정파적 편향성이 부각되면서 시민운동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신뢰는 현저히 저하되었다. 한편 사람들의 지식문화수준, 기술발전과 생산력의 증대, 민주주의의 발전 등 사회의 전반적인 자율성이 높아지고, 근대산업화·민주화 시기와는 구분되는 사회적 다양성과 개인주의의 심화, 세계화와 정보화 등 새로운 사회발전에 따른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변화하고 있다. 보통 시민사회의 두 가지 축은 권익과 책무의 측면에서 형성되는데, 한국도 사회발전에 따라 권익주창(Advocacy)에서 자원봉사(Volunteering)로 점차 기능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한국 시민운동에 있어 이른바 중도적 경향, 즉 이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좌, 우파의 당파성이 드러나지 않거나 그러한 신념의 실현을 중시하지 않는 시민운동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중도적 성향의 시민운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원봉사운동을 들 수 있고 풀뿌리 시민생활영역에서의 마을만들기, 주민자치 등 풀뿌리공동체운동 그리고 정치영역에서 매니페스토운동, 사회적 갈등중재와 성숙된 시민의식형성을 위한 시민교육운동, 정부·기업·시민사회 섹터간의 협력과 새로운 가치창출을 위한 거버넌스운동 등을 꼽을 수 있다.
2. 공동체(共同體)
한국에서 자원봉사활동이 시작된 것은 꽤 오랜 일이다. 과거에도 적십자사 등을 통해 재난재해에 대한 자원봉사활동이 조직되고 88올림픽 등 국가적 행사에 시민자원봉사자들을 조직했었고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나 복지시설 등에 대한 자원봉사서비스가 일상적으로 있어왔다. 하지만 국가나 그 주변조직들에 의한 하향식 방식, 단순한 시혜적 서비스 차원이 아니라 시민적 각성에 근거한 상향식의 자발적인 자원봉사운동, 즉 시민운동으로서의 자원봉사가 시작된 것은 불과 10여년 남짓이라고 생각된다. 자원봉사운동을 하는 대표적인 시민단체로는 볼런티어21(1997년 창립)을 들 수 있다. 언론 중에서는 초창기에 중앙일보가 자원봉사운동 확산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200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는 기업들의 자원봉사나 사회공헌활동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2007년 태안앞바다 기름유출사고 당시 100만 자원봉사자가 불과 수 주 만에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은 자원봉사운동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각 지방자치단체별 자원봉사센터 설치. 국가자원봉사기본법의 제정 등 자원봉사운동의 제도화가 진행되면서 예산지원을 무기로 한 행정부처의 간섭이 심해지고 개별 자원봉사단체나 센터를 실행기관으로만 활용하려는 관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자원봉사운동의 활력과 창의력을 떨어뜨리게 되며 최근에는 제도화한 센터를 중심으로 한 부분과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한 부분과의 반목마저 우려되고 있다.
열린사회시민연합(1998년 창립)이 지난 10여년 간 추구해온 운동은 풀뿌리공동체운동이었다. 그것은 남은 음식물 자원화 사업, 동네하천 살리기 운동 등의 지속가능한 생활환경실현운동, 저소득실직가정결연운동, 무의탁노인 집고쳐주기, 저소득가정 방과후학교 등 주민참여형 지역복지운동, 어린이도서관, 청소년자원봉사단, 공동체시민교육 등 자원봉사와 시민교육을 통한 공동체의식 확산운동, 주민자치센터참여사업, 삶터가꾸기 등 주민자치를 통한 지역공동체 형성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풀뿌리공동체운동에 있어 주민참여의 궁극적 목적은 참다운 공동체 형성에 있다. 사람들은 풀뿌리지역사회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을 인식하고 참여하여 그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자기존중만이 아니라 타인존중을 배우게 되고 공동체의 시민으로서의 책임감을 체득하게 되며 자기통제의 기술과 자치의 원리들을 배우게 된다.
담장허물기로 상징되었던 마을만들기운동이 지역의 물리적 환경을 바꾸어나가는 초기적 모습을 넘어서서 이제는 주민들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에서 마을주민들이 협력하여 마을을 꾸리고 관리하는 노력, 즉 생활자치를 통한 지역공동체만들기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들은 운동소재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의 운동들과 결합되는데, 공동육아, 대안학교, 대안미디어, 생협, 아파트공동체, 자활, 농어촌활력사업, 지역문화, 지역복지, 생활환경, 학습공동체, 평생학습, 자원봉사 등이 그것이다. 서울마포의 성미산공동체, 풀무학교로 유명한 충남홍성의 홍동마을, 전북 진안군의 으뜸마을가꾸기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제도화된 행정영역과의 협력을 통해 지역공동체만들기운동을 확산시켜 왔는데, 90년대부터 진행되어 온 지방의제21운동의 성과를 이어 마을단위의 마을의제운동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며 읍면동단위에 주민자치센터가 설치되면서는 주민자치센터를 통한 지역공동체활성화운동이 양적인 면에서나 관심도 면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들은 특정사안에 대한 요구형 운동이 아니라 주민들의 일상적 생활과 관련된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과제들을 해당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통해 해결하고 만들어가는 조성형(助成形)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들어서는 민관협력을 통한 사회창안운동이나 커뮤니티 비즈니스, 사회적 기업과 같이 정부·시장·시민사회 상호간 경계를 넘어선 창조적 협력으로 새로운 유형의 사업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는 흐름이 주목받고 있다.
매니페스토운동이 한국사회에 도입된 것은 풀뿌리시민운동을 전개해온 몇몇 단체가 중심이 되어 2006년도 지방선거에 대한 대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였다. 지방선거 관련한 네트워크 구성을 위한 전국 연석회의에서 매니페스토운동의 현실적 적용가능성이 검토되었고 몇 차례의 숙의를 거쳐 지방선거에 대응한 시민운동의 주요 운동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매니페스토추진본부는 지역별로도 추진기구를 결성하여 광역 12곳과 기초 20곳에 추진기구가 구성되었으며 전국적으로 384개의 단체가 참여하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여야의 주요정당과 후보자들, 선거관리위원회가 동참하여 운동의 사회적 신인도와 실현성을 높여주었다. 지방선거 이후에도 매니페스토운동은 상설조직을 결성하고 일상적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으며 2007 대선과 2008 총선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매니페스토운동은 특정정파나 정책에 대한 선호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SMART지표가 표현해주고 있듯이 후보자가 내건 공약에 대한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유권자의 주체적 선택을 돕는데 1차적 목적이 있다. 매니페스토운동은 인물과 정당 중심의 선거문화 속에서 무책임한 공약이 남발되고 정책이 실종되었던 그간의 한국정치문화를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시도였으며 선진적 정책선거문화를 뿌리내리고 성숙한 사회로 발전해갈 수 있도록 돕는 정치영역에서의 새로운 시민운동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생활에 필요한 지식정보의 습득, 다양한 갈등의 중재능력, 자기소외와 개인주의의 극복, 능동적 공동체 활동 참여,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형성 등과 같은 새로운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존의 학교교육시스템만으로는 이러한 평생교육적 요구에 부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시민들의 생활세계영역에서 실천을 매개로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시민운동의 영역이 보다 적합한 평생교육의 담당자로 떠오르고 있다. ‘성숙한 사회’, ‘더 좋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선구적 노력들이 사회 여러 곳에서 시도되고 있으며, 그것은 때로는 영성훈련이나 연찬 등의 보급과 확산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갈등조정훈련과 정책제안 등으로, 또 참여형 시민교육방법론의 보급과 공동체시민교육운동의 확산 등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3. 정명(正名)
중도성향의 시민운동을 이해할 때, 단순히 좌, 우의 정치적 스펙트럼 분류상 중간에 속한다는 의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제까지 근대화 과정의 시민운동이 취했던 국민국가단위에서의 진보 또는 보수 정체의 형성과 추동운동과는 다른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자각과 관련되어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책임성 상호간의 조화, 국가·시장·시민사회 상호간의 협력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익산지역의 주목받는 시민단체인 ‘희망연대’ 지도위원 이남곡선생이 제안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남곡 선생은 우리시대의 정명(正名)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사회가 “사회제도, 물질, 의식이 서로를 상승시키는 진정한 조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익과 경쟁, 대립과 투쟁을 넘어서는 상생의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아직은 아집이 있는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시스템과 물질적 준비를 통해 의식의 미흡함을 보완해가고 이런 실천의 과정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의식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며, 이러한 의식의 업그레이드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전체적 방향을 제시한다. 그를 위해 국가, 시장, 시민사회 모든 영역에서의 선진화, 인간화를 이룩해야 하며 그 중 시민사회의 역할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첫째 우리 내부의 소통문화를 높이는 것이다. '잘 듣고 잘 말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을 연습하여 '서로 양보하고 싶어지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둘째 지금 일하고 있는 분야에서 '더 좋고 밝은 사회 만들기'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민운동이 해오던 많은 부분을 정치(국가)나 시장에 돌리고 시민운동은 우리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시민주체의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의식과 삶의 방식을 뿌리에서부터 변화시키는 문화운동을 즐겁게 만들어가는 작은 결사들을 만들고 확대해가야 한다.
박홍순(열린사회시민연합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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